
<반지의 제왕> 삼부작을 다시 볼 때마다 늘 궁금했던 게 있다. 저 배우들은 대체 저 몰입을 어떻게 만들어낸 걸까. 찾아보니 그 답의 상당 부분은 '진짜로 아팠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그 촬영장에서 있었던, 웃기면서도 어이없고 때로는 감동적인 비하인드 에피소드들을 몇 가지 모아봤다.
1. 발가락이 부러진 채로 완성된 명연기
가장 유명한 일화부터 시작해보자. <두 개의 탑>에서 아라곤(비고 모텐슨)이 피핀과 메리가 죽었다고 오해하고 분노에 차서 오크 투구를 걷어차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 사실 대본에는 그가 그 자리에 무릎을 꿇는 지시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비고가 별다른 보호장구 없이 투구를 걷어찼다가 생각보다 투구가 단단하고 무거워서 실제로 발가락이 부러져 버렸다. 그 고통에 저절로 무릎을 꿇었고, 카메라에 잡힌 절규는 사실 캐릭터의 분노가 아니라 순수한 육체적 고통이었던 셈이다. 피터 잭슨 감독은 이 모습을 보고 "고통을 연기로 승화시키는 위대한 배우"라며 감탄했다고 하는데, 정작 비고 본인은 그냥 대충 응급처치만 하고 계속 찍자고 했다가 감독에게 제지당하고 병원으로 실려 갔다는 후일담도 전해진다. 이 장면을 알고 나서 다시 보면, 그 절박한 표정이 완전히 다르게 느껴진다.
2. 아라곤 역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경찰에게 붙잡힌 비고 모텐슨
비고 모텐슨의 몰입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아라곤이라는 캐릭터에 완전히 빠져들어서, 촬영이 없는 날에도 항상 자신의 검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갈 때도, 낚시를 하러 갈 때도 검을 어깨에 걸쳐두고 있었다는데, 문제는 이 모습이 일반 시민들 눈에는 그냥 장검을 들고 돌아다니는 수상한 사람으로 보였다는 점이다. 실제로 그는 이 때문에 경찰에게 몇 차례나 검문을 당했다고 한다. 흥미로운 건 비고 모텐슨이 원래 <반지의 제왕> 원작 소설을 읽어본 적도 없었고, 처음 캐스팅 제안을 받았을 때는 "애들 동화에는 출연하지 않겠다"며 거절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반지의 제왕>의 열혈 팬이었던 그의 아들이 아버지를 설득해서 결국 출연을 결심했다고 하니, 지금 우리가 아는 그 아라곤은 하마터면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던 셈이다.
3. 사과 하나 던지는 데 16번 — 그마저도 즐거웠던 비고
조금 더 유쾌한 이야기도 있다. 원정대 초반, 피핀(빌리 보이드)이 "두 번째 아침 식사는 없냐"고 투덜대다가 누군가 던진 사과에 머리를 맞는 장면이 있다. 이때 사과를 던진 사람이 바로 비고 모텐슨이었다고 한다. 완벽한 타이밍과 궤적으로 사과가 정확히 맞아야 했기 때문에 이 짧은 장면을 무려 16번이나 다시 찍어야 했는데, 함께 출연했던 빌리 보이드는 그 많은 테이크 내내 비고가 정말 신나 보였다고 회상했다. 발가락이 부러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던 배우가, 동료에게 사과를 던지는 소소한 장면에서는 순수하게 즐거워했다는 게 왠지 귀엽게 느껴지는 일화다.
4. 서핑하다 든 멍, 그래서 한쪽 얼굴만 나오는 장면이 탄생했다
뉴질랜드 촬영지에서 원정대 배우들은 쉬는 날마다 서핑을 즐겼다고 하는데, 비고 모텐슨은 어느 날 심하게 넘어지면서 얼굴 한쪽 전체에 멍이 들고 퉁퉁 부어버렸다. 다음 날 분장팀이 어떻게든 가려보려 했지만 도저히 감춰지지 않았고, 결국 피터 잭슨 감독은 아예 그 촬영 분량 전체를 비고의 한쪽 얼굴만 보이도록 찍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그 장면이 바로 모리아 광산에서 김리가 사촌 발린의 무덤을 발견하는, 꽤 무겁고 슬픈 분위기의 장면이다. 진지한 장면 뒤에 이런 웃긴 비하인드가 숨어 있었다는 걸 알고 나니, 영화를 보는 재미가 하나 더 늘어난 기분이다.
5. 죽을 뻔한 강물 신, 그리고 소품을 부숴버린 진짜 군인들
<두 개의 탑>에서 아라곤이 강물에 떠내려가는 장면을 촬영할 때는 훨씬 아찔한 사고가 있었다. 갑옷과 검의 무게 때문에 비고가 물속으로 그대로 가라앉아 실제로 익사할 뻔한 것이다. 또 다른 흥미로운 이야기는 모란논 전투 장면 촬영 당시의 일이다. 이 장면은 뉴질랜드군 사격 훈련장을 빌려서 찍었는데, 엑스트라로 출연한 진짜 뉴질랜드군 병사들이 소품 무기를 가지고 신나서 진짜로 치고받고 싸우는 바람에 준비했던 소품 대부분이 촬영 중에 박살 나버렸다고 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검들을 실제로 제작했던 검술 전문가는, 촬영에 협력하는 조건으로 배우 전원이 매일 아침 검술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요구했을 정도로 고증에 진심이었는데, 정작 엑스트라들의 이런 과몰입까지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 같다.
6. 원작자를 직접 만난 유일한 사람, 크리스토퍼 리
마지막으로 소개하고 싶은 건 사루만 역의 크리스토퍼 리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반지의 제왕> 캐스트와 스태프를 통틀어 원작자 J.R.R. 톨킨을 실제로 만나본 적이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원작에 대한 애정과 지식이 깊었던 그는 촬영 중 분장실에 자주 들러 몬스터들의 얼굴 디자인에 조언을 주기도 했고, 이런 원작에 대한 이해도 덕분에 삼부작 캐스팅 중 가장 먼저 확정된 배우이기도 했다. 화려한 특수효과와 CG 기술 이전에, 원작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곁에 있었다는 사실이 이 영화가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이렇게 하나씩 찾아보니, <반지의 제왕>이 명작으로 남을 수 있었던 건 단순히 뛰어난 각본과 특수효과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부러진 발가락을 참아내고, 검을 든 채 경찰에게 붙잡히고, 진지한 장면 뒤에서 얼굴에 멍이 든 채로 촬영을 이어갔던 이들의 진심 어린 몰입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화면으로 보는 그 감동이 완성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