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줄거리
영화는 1990년 에이싱크(Async) 연구소의 한 연구원이 노란 벽지와 형광등으로 가득한 미지의 공간 '백룸'에서 정체 모를 존재에게 쫓기는 과거 기록 영상으로 시작된다.
현대로 넘어와, 주인공 클락은 알코올 중독과 파탄 직전의 결혼 생활로 힘들어하며 심리치료사 메리에게 상담을 받고 있는 가구점 점장이다. 클락은 아내와의 불화로 가구매장에서 먹고 자는 신세이고, 매장에는 하루 종일 손님 한 명 보이지 않는데도 전기세는 왠지 모르게 과도하게 나온다. 어느 날 클락은 자신이 운영하는 가구점 쇼룸 지하에서 현실 너머의 차원인 백룸으로 이어지는 의문의 문을 발견하게 된다. 클락은 치료사 메리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지만, 메리는 이를 환각이라며 믿어주지 않는다.
증거를 남기기 위해 클락은 가구점 직원인 캣과 그녀의 남자친구 바비를 데리고 카메라를 든 채 지하의 문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그 기괴한 공간 속에서 바비가 정체 모를 괴물에게 끌려가고, 설상가상으로 클락과 캣마저 서로 분리되어 길을 잃고 만다. 공간을 헤매며 미쳐가던 클락은 메리의 음성사서함에 "나는 이곳에 남겠다"는 의문의 메시지를 남긴 채 사라진다.
결말
공포에 질린 메리는 클락을 구하기 위해 직접 가구점 지하의 백룸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곳에서 메리는 이미 정신이 완전히 붕괴돼 광기에 사로잡힌 클락과 재회한다. 클락은 메리를 기절시킨 뒤, 백룸이 사람들의 기억을 바탕으로 기괴하게 모방해낸 가짜 식당 공간에 그녀를 의자에 묶어둔다. 그곳에는 사람의 형태를 어설프게 흉내 낸 일그러진 복제 인간들이 앉아 있는데, 클락은 그들을 칼로 찌르며 이들이 하얀 물질로 만들어진 가짜 존재임을 보여주고, 냉장고 안에 든 캣의 머리를 보여주는 등 기괴한 행동을 일삼는다.
그 순간 기괴하고 거대한 괴물이 나타나 클락을 물어 죽이고 메리를 추격하기 시작한다. 메리는 자신의 어린 시절 트라우마와 기억이 기형적으로 뒤틀려 재현되는 백룸의 방들을 거치며 필사적으로 도망친다. 막다른 길에 몰린 메리는 자신의 옛 조각상을 이용해 괴물의 얼굴을 내려치며 간신히 방을 빠져나온다.
하지만 탈출한 메리를 맞이한 건 진짜 현실이 아니라, 이 공간을 비밀리에 발견하고 관측해오던 배후 조직 '에이싱크 연구소'다. 연구소 직원 필은 자신들이 MRI 기술을 연구하던 중 우연히 이 차원을 발견했다고 설명한다. 메리는 자신을 보내달라고 애원하지만, 필은 모호한 답변만을 남긴 채 그녀를 가둬둔다. 결국 영화는 메리의 기억과 트라우마가 형상화된 취조실 안에서, 기괴하게 일그러진 또 다른 가짜 메리와 홀로 마주한 채 갇혀버리는 결말을 보여주며 암전된다.
후기 — 리미널 스페이스의 공포를 스크린으로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익숙한 공간이 주는 이질감이다. 가구점 쇼룸 지하라는 평범한 공간에서 시작해 노란 벽지와 형광등 소리로 가득한 백룸으로 전개되는 과정은 관객의 숨통을 조여온다. 아무런 인기척이 없는 이 광활한 공간은 일상적인 공간이 마땅히 줘야 할 안정감을 철저히 배반하며 공포를 만들어낸다. 게임이나 인터넷 밈에서는 이런 공간을 흔히 '리미널 스페이스'라고 부르는데, 이 영화는 그 개념을 실사 공포로 완벽하게 구현해냈다. 특히 사람의 형태를 어설프게 흉내 낸 복제 인간들이 앉아 있는 가짜 식당 시퀀스, 그리고 흰 물질로 만들어진 가짜 존재들을 클락이 단죄하듯 찔러대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기괴하면서도 강렬한 장르적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공간의 공포를 넘어, 이 영화는 클락과 메리라는 두 인물의 심리를 통해 단순한 괴물 슬래셔 무비 이상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알코올 중독과 결혼 생활의 파탄으로 이미 내면이 무너져 있던 클락이 백룸이라는 절대적 고독 속에서 서서히 광기에 잠식돼가는 과정은, 배우들의 열연과 맞물려 상당한 몰입감을 준다. 후반부 메리가 자신의 어린 시절 트라우마와 기억이 기형적으로 뒤틀려 재현되는 방들을 거치며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연출은, 외부의 괴물보다 오히려 자기 자신의 내면을 마주하는 게 더 무섭다는 걸 보여주며 심리적 공포의 정점을 찍는다.
가장 서늘한 지점은 역시 결말이다. 간신히 괴물을 따돌린 메리가 마주한 진실이 구원이 아니라 또 다른 감금이라는 사실, 그리고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차원을 몰래 관측해온 조직에 의해 메리가 다시 취조실에 갇힌다는 결말은 숨 막히는 절망감을 안긴다. 특히 마지막 순간 자신의 기억과 트라우마가 형상화된 취조실 안에서 기괴하게 일그러진 또 다른 가짜 메리와 마주하는 엔딩은, 크레딧이 올라간 뒤에도 쉽게 가시지 않는 여운을 남긴다.
여담 — 21살 감독이 만든 박스오피스 1위 공포영화
어쩌면 이 영화에서 가장 무서운 대목은 따로 있다. 클락은 손님 한 명 없는 이 광활한 백룸의 전기세를 자기도 모르게 계속 내고 있었다는 점이다. 손님도 없고 나름 전기세도 아끼는데 왜 이렇게 많이 나오지, 라는 생각이 든다면 이미 이 영화의 공포에 발을 들인 셈이다.
이 영화의 감독은 케인 파슨스라는, 2005년생의 정말 젊은 감독이다. 그는 만 13세경 유튜브에 단편영화를 올리기 시작했고, 만 16세에 '백룸 시리즈'를 유튜브에 업로드했다. 이 시리즈가 큰 인기를 얻으며 결국 정식 장편 영화로까지 만들어지게 됐다. 영화 음악까지 직접 만든다고 하니, 21살에 이 정도 다재다능함이라니 감독 본인의 커리어 자체가 또 다른 공포로 다가온다. 이 영화가 감독의 이전 유튜브 시리즈를 반드시 봐야만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은 아니지만, '백룸' 세계관에 관심이 있다면 원작 시리즈부터 찾아보는 것도 꽤 흥미로운 감상 포인트가 될 것 같다. 감독의 유튜브 채널명은 Kane Pixels다.
참고로 이 영화로 파슨스 감독은 미국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최연소 감독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촬영을 위해 3만 제곱피트 규모의 실제 백룸 세트를 제작했는데, 세트가 워낙 방대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나머지 스태프들이 실제로 세트 안에서 길을 잃는 해프닝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 정도로 잘 만든 세트라면 나중에 테마파크로 만들어도 재밌을 것 같은데, 아이들이 진짜로 길을 잃지 않도록 조심은 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