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글에서 관람 후기를 남겼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원작 오디세이아와 실제로 얼마나,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따로 정리해두면 좋을 것 같았다. 단순한 각색 차원을 넘어, 놀란 감독이 왜 그렇게 바꿨는지를 살펴보면 이 영화가 하려는 이야기가 더 선명하게 보인다.
서사 구조의 차이 — 기억을 잃은 오디세우스
원작 오디세이아도 사실 시간순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이야기는 오디세우스가 이미 칼립소의 섬에 7년째 붙잡혀 있는 시점에서 시작해, 이후 그의 과거 모험담을 회상 형식으로 들려주는 구조다. 하지만 원작의 오디세우스는 모든 걸 또렷이 기억하고 있으며, 파이아케스족 앞에서 스스로 담담하게 자신의 여정을 이야기한다. 반면 영화는 여기에 '기억 상실'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장치를 얹었다. 오디세우스가 칼립소와 함께 살면서도 정작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잊고 있는지조차 모른 채 서서히 기억을 되찾아가는 방식은 원작에는 없는 순수한 각색이다. 이 장치 덕분에 관객은 오디세우스와 함께 그의 과거를 '재구성'하게 되고, 이는 원작이 주는 것과는 또 다른 종류의 서스펜스를 만들어낸다.
텔레마코스의 여정도 각색됐다. 원작에서는 오디세우스가 아들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텔레마코스가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필로스와 스파르타로 떠나고, 그 과정에서 멘토르(사실은 변장한 아테나)와 함께 필로스의 왕 네스토르를 만난다. 오디세우스와 텔레마코스는 원작에서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의 오두막에서 재회한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오디세우스가 직접 필로스로 가서 아테나 신전에서 텔레마코스, 그리고 그의 조력자 멘토와 만나 아들을 노리는 암살 시도를 막아내는 것으로 바뀌었다. 부자가 더 일찍, 더 극적으로 만나도록 구조를 압축한 셈이다.
신화적 존재의 재해석 — 아테나, 그리고 사라진 신들
가장 인상적인 각색 중 하나는 아테나 여신의 처리 방식이다. 원작에서 아테나는 오디세우스를 시종일관 돕는 신으로 직접 등장하지만, 영화에서는 인간의 모습으로 등장하다가 영화 후반부에 가서야 그녀가 사실 트로이 함락 당시 살해당한 여사제였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즉 영화는 신을 신 그 자체로 등장시키기보다, 오디세우스가 저지른 죄와 그로 인한 죄책감이 만들어낸 환영에 가깝게 재해석한 것이다. 포세이돈 역시 원작처럼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오직 폭풍이라는 현상으로만 그 존재가 암시된다. 신화 속 신들을 직접 등장시키기보다 인간의 심리와 죄의식으로 치환하는 이런 방식은, 초자연적 존재보다 현실적 논리를 선호해온 놀란 감독 특유의 화법과 맞닿아 있다.
이 밖에도 원작 속 아이올로스의 바람 자루 에피소드와 파이아케스족 이야기는 영화에서 완전히 삭제됐고, 사람을 잡아먹는 라이스트리곤 거인족은 원작과 달리 완전 무장한 갑옷 전사들로 재해석됐다. 사소해 보이지만, 안티노오스(구혼자 중 한 명)와 시논(트로이 목마 계략을 도운 인물)을 서로 얽힌 관계로 설정한 것도 원작에는 없는 창작이다. 원작에서는 이 두 인물이 아무 접점이 없다.
'바다에서 온 사람들' — 원작에 없는 완전히 새로운 위협
영화를 보면서 가장 낯설게 느껴졌던 설정이 바로 '바다에서 온 사람들'이었는데, 알고 보니 이건 호메로스의 원작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 놀란 감독이 완전히 새로 만들어 넣은 요소였다. '바다 민족(Sea Peoples)'은 실제로 기원전 1200년경 청동기 시대 문명 붕괴기에 지중해 동부를 휩쓸었다고 알려진 정체불명의 침략자 집단을 가리키는 실제 역사적 용어이지만, 원작 오디세이아에는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는 이 존재를 이야기 초반부터 스파르타와 이타카를 위협하는 소문으로 계속 언급하며, 텔레마코스가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를 만나는 장면에서도, 어머니 페넬로페와 나누는 대화에서도 반복해서 등장시킨다. 그러다 영화 말미에 이르러 오디세우스 스스로 충격적인 해석을 내놓는다. 어쩌면 자신과 부하들, 그러니까 트로이를 무너뜨리고 떠도는 그리스 전사들 자신이야말로 다른 왕국들이 두려워하는 '바다에서 온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트로이 목마라는 계략으로 '제우스의 법(환대의 규범)'을 깨뜨린 순간부터 청동기 시대라는 황금기 전체가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게 영화가 오디세우스의 입을 빌려 던지는 해석이다. 이는 <오펜하이머>에서 원자폭탄의 발명이 곧 파멸의 시작이었다는 암시를 던졌던 놀란 감독의 화법과 이어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신화 속 영웅담을 그 시대 자체의 몰락에 대한 알레고리로 바꿔놓은, 이 영화에서 가장 대담한 각색이라고 할 수 있다.
결말의 근본적 차이 — 왕좌에 남지 않는 오디세우스
가장 큰 차이는 역시 결말이다. 원작 오디세이아는 오디세우스가 구혼자들을 모두 처단한 뒤 페넬로페와 재회하고, 이타카의 왕좌를 되찾아 평화를 회복하는 것으로 끝난다(이후 전승에 오디세우스가 다시 방랑길에 오른다는 이야기가 있긴 하지만, 이는 오디세이아 본편이 아니라 후대에 덧붙여진 다른 서사시의 내용이다). 반면 영화는 정반대의 결말을 택한다. 구혼자들을 몰살시킨 행위가 그들의 가족과 동료들에게는 또 다른 피의 복수를 부를 수밖에 없는 사건이라는 걸 텔레마코스와 오디세우스 모두 깨닫게 되고, 결국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는 왕좌를 텔레마코스에게 넘긴 뒤 스스로 이타카를 떠나 유배와 다름없는 여정에 오른다. 자신들의 이야기는 이제 아무도 기록하지 못할 것이며 오직 노래로만 전해질 거라는 오디세우스의 마지막 대사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이 결말의 변화는 단순한 각색을 넘어 영화 전체의 주제를 뒤바꾸는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원작이 오랜 시련 끝에 질서와 가정을 되찾는 '귀환과 회복'의 이야기라면, 영화는 폭력의 대가가 완전히 씻기지 않고 다음 세대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걸 인정하는 '대가와 속죄'의 이야기에 가깝다. 실제로 관람할 때는 이 결말이 다소 뜻밖으로 느껴졌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앞서 말한 '바다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설정, 그리고 청동기 시대의 몰락이라는 주제와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결말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승리한 영웅이 왕좌에 앉는 대신 스스로 떠나는 선택을 하는 것 자체가, 이 영화가 신화를 무조건적인 영웅담이 아니라 그 대가를 함께 짊어지는 이야기로 다시 쓰고 싶어 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